책과 문학

판타지 쟝르에 대한 글

이 글은 쁘뉴마님의 글 “쟝르환타지 이야기”에 대한 트랙백 차원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http://pneuma.onblog.com/blog/blog_post_list.jsp?owner_uid=20434&post_uid=201266#post201266

쁘뉴마님과는 다소 궤를 달리함을 미리 밝힙니다.

저는 판타지라는 쟝르가 가지고 있는 공통된 철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지적하신 비쥬얼한 면이 강하다는 특징이 판타지 쟝르를 상업적 부흥의 원인이라고 보고 있죠. 그러나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판타지 작품들이 판타지의 철학을 계승하고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상업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에 더욱 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기 쉬워진 사례가 되는 거죠. 이것은 무협 쟝르에서도 마찬가지 양상을 띠고 나타나지만 판타지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그 소비계층이 쟝르 공통의 철학 내지는 작품의 품질을 판단하기에는 너무 어린 연령대(10대에서 20대)에 편중되기 때문입니다.

사극에도 공통된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봤거나 구전으로 들었던 역사적 사실을 드라마적으로 각색함으로써,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미처 몰랐던 음모나 애정 관계, 역사적 인물들의 인간적인 고뇌와 과오 등에 대해서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는 게 쟝르의 (철학까지는 아니더라도) 목표나 특징 정도가 되겠죠.

과연 사극의 핵심이 한복일까요? 한복을 입고 현대 극을 한다면 그런 드라마를 누가 보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우습죠. 우리가 사극을 볼 때는 나름대로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주인공이 역사적으로 눈에 띄는 업적을 이룬 실존 인물이었다는 점이 1차적인 매력으로 작용하고, 2차적으로는 국가간의 전쟁이나 왕조의 교체 등등의 규모가 큰 사건에서 생동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2차적인 매력은 판타지나 무협 쟝르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니까 부연하진 않겠습니다.)

다시 판타지로 돌아가서 판타지의 철학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상업적으로 성공했으되 판타지 쟝르에 접점을 가지지 않거나 거의 희박한 저질 판타지물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판타지 쟝르는 서양판 무협 쟝르라고 말할 수 있듯이 서양인들에게는 친숙한 신화와 전설이나 민담에 등장하는 상상의 종족이나 동물들, 또는 (지적하신 대로 독특한 복식을 포함하여) 미쟝센으로 동작하는 설정, 그리고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야깃거리를 바탕으로 해서 진행되기 마련입니다. 판타지의 철학은 서양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내가 바로 어디선가 들어봤고 꿈꿔왔던 이야기'를 문학작품을 통해 재현하는 그 '과정'입니다. M. 엘리아데가 말한 것처럼 이러한 재현을 통해 신화가 재생(다시 신성을 확보함)되고 각 민담의 개별성에서 벗어나 보편성을 획득해 나가는 과정을 밟게 되면서 쟝르화가 이루어지는 거죠.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판타지 쟝르의 정점에 위치한 작품이긴 한데, 우리가 너무 반지류의 작품들만을 판타지라고 좁게 인식하다보니 판타지처럼 보이는 작품들끼리의 접점이 딱 눈에 띄지 않는 것 뿐입니다. 다음의 링크를 참고해보시면 판타지에도 서브 쟝르가 상당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실 겁니다.

http://no-smok.net/nsmk/_c6_c7_c5_b8_c1_f6

어쨌든 쁘뉴마님께서 마지막 단락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문화에 판타지 쟝르를 도입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데는 동의합니다. 이것은 아무래도 쟝르 근저에 깔려있는 배경 지식이 얕기도 하거니와 단순히 몇몇 작품을 탐독한다고 익혀지는 게 아닌 생활 방식이나 전통에 맥이 닿아있는 거라서 이질적인 그 무언가를 옅게 하기 어려운 거죠. 쁘뉴마님 지적처럼 차라리 사극이나 무협이 좀 더 그럴싸하게 먹힐 것 같습니다. 다만 한반도라는 아주 좁고 끊임없이 외란에 시달렸던 배경/지역적 특성때문에 그런 소재를 발굴해내기가 쉽지 않겠습니다만, 비천무처럼 적절히 사극과 무협을 혼합하여 성공한 '한국식 판타지(쁘뉴마님 표현을 뒤집어서… 무협이나 순정물에 가까운)'도 없지 않으니 말입니다.

댓글 4개

  • 쁘뉴마

    에… 근데 언급하신 '사극의 정신'을 일반화시키기에는 '대장금' 작가의 허다한 유사 사극(?)과 춘향에 관련된 사극(…이라는 정의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다모'류 등의 예가 있어서 어떨런지 모르겠습니다. '사극'의 정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겠군요.

    링크해주신 곳과 같은 환타지 분류는 조금 확대해석이라고도 생각되고요. 개인적으로 뱀프물이나 마술적 리얼리즘을 장르환타지와 비슷한 것으로 규정하는 데 회의를 품습니다. 그래서 '장르환타지'라는 이름을 굳이 썼던 것이고요.

    그런 식이면 '무협' 역시 일종의 환타지가 되는 등, 소위 넓은 의미의 '환타지' 개념으로는 장르 구분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 같아요. 해당 장르에 흔히 나타나는 이야기 구조와 장르의 '정신'은 조금 다른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

  • Terzeron

    어쩌면 말이죠. 제가 쓴 '철학'이나 쁘뉴마님의 '정신'이라는 표현보다는 '스타일'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같은 쟝르라 하더라도 철학이나 정신을 공유한다는 건 사실 어렵기도 하거니와 쟝르를 좁게 한정하는 부작용이 있거든요. 그러니 스타일에 있어서 접점을 찾는 게 올바른 쟝르에 대한 정의를 모색하는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이 답글이 쁘뉴마님의 지적에 대한 답변이 될 것 같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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