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 3부작
천천히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 철학 전공자답게 박찬욱 감독은 사회에서 금기시되어 왔던 ‘복수’, ‘살인’, ‘근친상간’ 등의 파격적 테마를 화두로 올려놓아 관객들이 단순한 수용자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해석자로서 영화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주었다.
복수 3부작은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을 말한다. 감독은 이 세 작품을 차가운 영화, 뜨거운 영화, 따뜻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감독이 이 씨리즈를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첫번째 작품 “복수는 나의 것”은 복수가 복수를 부른다는 이야기이다. 영화 “구타유발자들”에서 폭력이 폭력을 낳는 악순환이 계속된다는 것처럼, 유괴는 유괴범에 대한 ‘테러’로, 장기매매 사기는 사기단에 대한 ‘응징’으로, 유괴범에 대한 테러는 다시 비밀결사에 의한 ‘처단’으로 앙갚음되지만 끝을 보이지 않고 복수는 바통(baton)을 넘겨가며 계속 이어진다. 영화가 끝나도 복수는 여전히 이어질 것 같은 여운을 남긴다.
이와 비슷한 관점에서 두 영화를 바라본 평론가의 글이 있어서 링크를 건다.
폭력은 진화하는가? “구타유발자들” 폭력의 미학에 관한 고찰 – 강유정
두번째 작품 “올드보이”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오대수가 저지른 사소한 실수가 누이의 죽음을 초래하고, 이우진이 엄청난 음모와 계획으로 오대수에게 보복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우진은 결국 복수의 허망함을 깨닫고 자살하게 된다. (여기서 근친상간이라는 장치는 ‘복수’라는 주제와 살짝 비껴 있으므로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복수는 이루어졌으나 그 행위가 시간을 돌려놓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복수’는 더 이상의 선택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기에 허망할 따름이다.
세번째 작품 “친절한 금자씨”는 백선생의 유괴/살해 사건에 가담했던 이금자가 죄의식을 씻기 위해 ‘친절하게’ 희생자 유가족들을 위한 복수의 무대를 마련한다는 다소 유쾌한 플롯으로 짜여져 있다. 이금자의 복수는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일반적인 ‘복수’와는 달리, 정신적인 구원(죄씻음)을 위한 복수 대행업인 것이다. 그러나 이금자는 현실세계에서의 면죄부를 얻었을지언정 정신적인 구원을 얻지는 못한다.(살해된 아이가 환영이 되어 나타나 이금자에게 재갈을 물린다.)
이 영화의 단점을 하나 지적하자면, 백선생과는 직접적인 원한의 관계가 모호한 이금자가 복수를 주도하는 것은 군더더기를 떼고 보면 다소 어설픈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적인 명백한 선과 악의 편가르기(백선생과 희생자 유가족들)의 구도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회색인 이금자의 복수는 ‘복수’라는 행위의 위상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한 점 부끄럼 없이 올바르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악을 내버려두기는 치떨리는 그런 상태 말이다.
이상한 나라의 도로시님의 “친절한 금자씨 – 복수의 아이섀도우”는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른 관점의 영화 읽기이다.
내 나름대로 세 편의 작품을 복수라는 한 가지 주제로 꿰어 요약해보자면, 복수는 복수를 낳고, 복수에 성공해도 허망함은 씻을 수 없고, 복수를 통해서는 양심의 가책과 구원 양쪽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