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설” by 다니자니 준이치로
내가 읽은 올해의 책을 꼽자면,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세설”(1936년작)
남성 작가인데 여성 화자의 입장에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사실 내가 남자다보니 여성 심리 묘사가 얼마나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수십 년간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읽기도 했고 좋아하는 편이니 나름 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해도 되지 않을까?
드라마틱한 플롯은 없고 어찌보면 아침드라마 같은 소소한 에피소드들(언니의 입장에서 여동생들의 결혼과 연애 문제를 고민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인데 흡입력이 뛰어나다.
거의 백년 전 일본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데 의외로 현대적이라서 군데군데 놀라는 점들이 있었다. 상견례를 할라치면 호텔에서 만나고 호텔까지 전차나 택시를 타고 이동하며, 전화로 연락을 취하고, 콤팩트로 화장을 하고, IQ테스트를 하고, 라이카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 현대적인 문물이 자연스럽게 소품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많아서 이 정도면 한국현대소설이라고 해도 속을만하다. 30년이나 더 이전에 발표된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1906년작)을 읽었을 때도 상당히 현대적이어서 놀랐는데 이 작품은 그냥 현대물이다.
등장인물들의 사고방식조차 근현대 한국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놈의 체면치레..
그리고 한 가지 배운 점이 있다. 일본말에는 “이모”(엄마의 자매)라는 개념이 없고 그냥 “언니”라는 호칭만 있다. 조카가 이모한테 언니라고 불러서 처음에는 상당히 혼란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