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기업의 인재상

오늘 내가 속한 개발팀 회의 시간에 개발 일정을 정리하다가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그 중 하나가

'지금 잡아 놓은 일정이 다른 작업때문에 늦춰지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개인 시간을 투자해서라도 맞춰야 하느냐?'

'그렇다.'

'업무 시간에만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개인 시간을 투자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 회사의 인재상이 그러하다.'

내가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대략 위와 같은 대화가 오고 갔다. 아무도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고 곧 점심시간이 되었다. 나는 카메라/렌즈 포커스 조정을 위해 캐논 A/S 센터에 다녀왔고 빵 두어 개를 사들고 들어와서 회의실에서 혼자 점심을 간단히 해결하게 되었다.

혼자서 회의실에서 빵을 우걱우걱 씹다보니 이것저것 생각이 들었다. 개발이라는 게, 직장 생활이라는 게 단순화시키기 어렵겠지만 다음의 여러 시나리오를 떠올려봤다. 이런 상황에 회사나 중간 관리자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1. 기본 업무가 주어졌고 주어진 일정에 맞춰 개발을 완료했다 –> 회사입장에서는 사원이 당연히 해야 할 일. 포상따윈 없다.

2. 기본 업무가 주어졌는데 일정을 못 맞췄다 –> 업무 평가가 나쁘게 나오겠지.

3. 기본 업무에다가 다른 업무가 추가되었고 업무 시간만을 투자하여 주어진 일정에 맞춰 개발을 완료했다 –> 당근 이렇게 해야 된다. 일을 잘하거나 업무가 적은 것 같으니 담당 업무량을 늘려주마.

4. 기본 업무 + 추가 업무, 업무 시간만을 투자하여 일정에 못 맞췄다 –> 불량사원, 업무 평가 not good

5. 기본 업무 + 추가 업무, 개인 시간까지 투자하여 주어진 일정에 맞춰 개발을 완료했다 –> 보통은 하는군. 그냥 평범한 능력. 요즘 불경기인데 이렇게 해야 하지 않나?

6. 기본 업무 + 추가 업무, 개인 시간을 투자했는데도 일정을 못 맞췄다 –> 적당히 감안은 하지만 '가능하면' 열심히 해서 일정을 맞추는 습관을 가지도록 하자.

난 이미 지금 회사를 그만두고 블로거들 사이에서 악명높은 n모사로 옮길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회사의 인재상이 뭐든, 추가 업무가 떨어지든 말든 별로 신경쓸 필요는 없다. 물론 n모사는 주5일제라지만 업무량이 지금 회사보다 적지는 않을 거라는 각오는 하고 있다.

우리 개발자들은 너무 쉽게 기업의 요구와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고 하는 기질이 있다. 어느 IT업체나 칼퇴근은 사원의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기업으로부터 허락받아야만 행사할 수 있는 소극적인 권리 이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업무가 바쁘지 않아도 상사 눈치, 동료 눈치를 봐야 하는 분위기 때문에라도 칼퇴근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없다.

학교를 마치고 처음 다녔던 회사는 아침 9시부터 밤 11시까지 근무하기를 요구했다. 노골적으로.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눈이 많이 내리던 날, 9시반에 퇴근하겠다고 했다가 10시 반까지 사장의 설교를 들어야 했고 결국 폭설때문에 새벽 1시에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던 몹시 불쾌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에는 사회 경험도 없고 해서 내 자신이 잘못된 직장인의 자세를 가지고 있다고 반성했으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아무리 좋게 생각하더라도 '기업의 사원에 대한 폭력'에 다름아니다.

기업은 당연히 이익 추구를 위해서 사원들을 독려하고 일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필요한 방법들을 사용하여 사원들을 강제할 것이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기업이 돈을 벌지 못한다면 사원들도 돈을 벌지 못한다. 기업의 존재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의 크기를 계량하기 어려운 지식 노동자들의 개인 시간을 희생하는 것만이 기업이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기업의 생각은 어떤지 몰라도 사원이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한다면 그것은 자신에게나, 나아가 동료들에게까지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매일매일 충분한 휴식을 가지고 업무의 품질을 높이려는 노력, 자신의 업무에 대한 책임감, 즐겁게 일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제품을 차별화하는 것… 이런 것이 무작정 회사에서 두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뭉개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을까?

댓글 2개

  • 박영철

    잘 읽고 간다.. 이직은 성공했니? 글로써 미루어 보건데 아닌것 같구나.. tel로 시작하는 회사 이야기 맞지? 지금 일하는 회사 주업무도 SKT 랑 관련된 것이라서 대충 들어본 곳인데.. 답답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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