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행복
나는 가끔 불행하다. 대부분의 시간은 평균적인 대한민국 국민의, 아니 좀 더 정확하게 집어내자면 평균적인 서울시 시민의 행복 수준에 가까울 것이다. 적당히 교육받고 적당히 직장생활을 통해 벌이를 하고 아직은 전세살이에, 출근 시간마다 지하철 1호선과 2호선의 수많은 인파에 치이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다. (물론 평균이 아닌 점도 있겠지만 그야말로 모든 상황에서의 내 특질의 평균을 내보자는 거다)
그러나 내가 홀로 소유할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나는 불행하다. 요즘은 퇴직 의사를 밝힌 후라 그나마 내 맘대로 일찍 퇴근하는 편이라서 저녁에 개인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으나 단 한 명의 식구인 아내와 함께 저녁 시간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홀로 책을 읽고, 홀로 글을 쓰며, 홀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은 (화장실에서의 잠깐 빼고는) 없다. 그렇다 눈치 빠른 이라면 이미 감잡았을 것이다. 이것은 당송팔대가인 구양수가 제시한 글을 잘 쓰는 방법, “다독, 다작, 다상량”에 해당한다. (한자가 어떻게 되냐고 물으실 분은 Alt+F4를 누르시라! 실은 난 서독 구양봉밖에 모른다.)
이 글의 제목을 처음에는 “글 쓰기의 행복”이라고 적으려 했으나 생각해보니 글 쓰기가 어려운 이유는 바로 혼자 있는 시간의 절대 부족이 원인인 바, 고독의 행복이라고 고쳐쓰게 되었다.
나는 글을 쓰고 싶다. 이는 내가 프로 작가도 아니고 내 직업이 글 쓰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며 내게는 글쓰기의 재능이 없다는 것도 알지만 잡문이라도 쓰고 싶을 때가 있다. 이것은 청와대 대변인이 아니라 보통 사람이라도 뚫린 입으로 말하고 싶은 거랑 같은 원리다. 글을 쓸 수 있을 만큼 배울만큼 배웠으면 말보다는 생각이 정리된 글을 쓰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란 말이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써갈긴다고, 고민없이 술술 끄적거린다고 모든 글이 글이 되는 게 아니다. 이런 역설의 묘는 유명한 SF작가 시어도어 스터전의 “SF의 90%는 쓰레기다. 그러나 모든 것의 90%는 쓰레기다.”라는 격언과 일맥상통하는 법이다. 굳이 글로 남길 필요가 없는 쓰레기들이 글이 되어봤자 가치가 높아지는 게 아닌 셈이다. 그래서 많이 읽고 많이 써보고 많이 생각하는 경험을 통해 좀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글을 남기는 모든 이들에게 요구되는 겸손의 덕목일 것이다.
책 읽는 거라면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서 읽을 수 있다. 지하철에서 보내는 출퇴근 시간도 귀중한 독서의 시간이다. 시끄러워도 독서에는 별로 방해가 안 된다. 냄새에만 적응된다면 화장실에서의 독서도 감지덕지. 생각은 따로 시간을 낸다는 게 우습다. 내가 가장 싫어했던 것이 학생 시절의 “명상의 시간”인데 원래 잡념과 고민이 많은 인간에게 명상의 시간은 별로 생산적이지 못했던 탓일 게다.
그러나 글쓰기는 아무리 간단한 글을 적는다 하더라도 타인의 끼어들기로부터 자유로운 연속된 시간이 확보되어야 한다. (나만 그런가?) 이것은 글쓰기와 사색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다. 이전에 가지고 있던 글쓰기의 소재를 정리하면서 내가 말하고자하는 바를 글쓰기화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타인으로부터 방해를 받는다면 연속된 사고를 하기 어려워지고 자신이 말하고자하는 바의 논지를 명확하게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래봤자 밤 12시를 넘겨야 있을까말까하고 매일 출근을 해야 하는 직장인이기에 12시가 넘는 한밤중에 생각을 하고 글 쓰기를 하기는 어렵다. 다음날 피곤하기도 하고 자칫하면 다른 식구들의 수면을 방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나야 식구래봤자 아내뿐이지만…)
이런 이유로 가끔은 나도 고독을 즐기고 싶다. 기껏해야 1주일에 한 번 밖에 혼자만의 시간을 갖지 못한다는 건 너무 아쉽다. 1주일에 한 번이라면 그 동안 글로 정리해두면 좋을 것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남기기 어렵다. 월요일에 했던 좋은 생각을 토요일에 기억할 수나 있을까? 나이가 들면서 많은 것을 잃어간다는 것은 물질적인 것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 이외에도 내가 꿈꾸는 것들을 스스로 잃어버리고 남기지 못한다는 의미까지 포함한다.
유부남이 싱글예찬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을 찾기 위해 자주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따름이다. 그래야 자신을 되돌아보고 타인과 함께 하는 시간의 소중함도 절실하게 느끼게 되겠지.
댓글 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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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있으면 그래도 덜 외롭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아내가 안쓰럽게 느껴지는 건 왜일지…
Terzeron
너무 쉽게 말을 하시는군요. 제 글을 제대로 읽어보기나 하신 건지… 익명성의 뒤에 숨어서 쉽게 말하지 않아주셨으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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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나쁘게 들렸다면 죄송하네요. 그냥.. 님의 글을 읽고 당장에 드는 생각을 적는다는게 그랬죠.. 저와 아주 가깝게 있는 사람 중에, (님과는 다를 것이라고 믿고 싶지만..) 아주 비슷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지요. 물론 결혼도 했고, 애도 있고, … 좋은 직장에서 돈도 꽤 벌었고 해서 충분히 안정됐다고 할만큼 괜찮게 삽니다. 그런데… 항상… 뭐 재미나는 일 없냐며 두리번 거리죠… 뭐.. 자기는 재미삼아 말한다지만, 옆에서 보기에는 얼마나 한심하게 보이는 줄 아시는지… 제가 아는 한, 고독은 누구에게나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주위의 다른 사람에 의해서도 충분히 메꿔질 수 있는게 또한 그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내이고요. 서로 구속하고 어쩌고 남자 마음이 어쩌네 여자마음이 어쩌네..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들을만큼 님이 모자란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렇지만, 최소한…….. 어차피 아내가 여기까지 보지는 않을이상…(보면 좀 곤란할 수도 있겠군요..) 아내라는 사람이 님의 고독을 어느정도 채워줄 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 느껴지네요. 아니, 그런 고독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은 님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게 맞을 지도 모르죠. 아무튼… 설명이 좀 길었네요.
anybody
누구나 한번쯤은 작가가 되기를 꿈꿔보지 않나 싶어요. 자신의 글에 도치되어 보기도 하고 절망해 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글을 쓴다는 그 자체에 만족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게 아닌가 싶네요. 물론 '잘'쓰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노력과 투자가 필요하겠지만…글을 쓰는데도 용기가 필요한 것 같아요. 금기나 소신을 말하는 용기와는 다른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확신. 저는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참 부러워요. 글을 잘 못쓰거든요. 그래도 전 제 글을 읽을 때면 나름대로 즐거워요. 글을 쓸 수 있다는 여지와 그것에 대한 욕심이 이 범상스럽고 일상적인 제 삶의 오아시스가 아닌가 싶네요.
Terzeron
제 와이프가 익스플로러를 띄우면 이 홈페이지가 첫화면으로 뜹니다. 읽을 가능성이 높겠죠. 제가 말하는 고독은 인간과의 교류에 의해 해소될 만한 그런 성질의 고독이 아닙니다. 제가 글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여기서 말하는 고독이란 글쓰기를 위해 필요한 사색의 시간을 뜻하는 거니까요. 어떻게 보면 '글 쓰기에 대한 갈망'에 가깝다고 할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제가 ..님께서 오해를 하셨다고 판단를 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