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엑스칼리버(Excalibur), John Boorman, 1981
이 영화는 국가 수립에 대한 여러 표상들로 가득 차 있는데, 당연히 아서왕은 그 자체로 국가와 영토를 의미하고, 멀린은 왕을 세워 통일 국가를 만들고 국가가 운영될 수 있도록 해주는 질서(멀린의 마법!)를 상징하고, 멀린이 왕을 위해 준비한 엑스칼리버는 왕의 정통성과 그것에 기반한 국가 권력을 의미한다. 이 영화에서 독특하게 엑스칼리버가 부러지는 사건이 나오는데, 멀린이 아니라 호수의 여신이 다시 칼을 벼려 돌려주는 장면에서는 국가 권력이 본디 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 또는 신으로부터 부여된 것임을 암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서왕 이야기는 스코틀랜드 전설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후 기독교적인 덧칠이 가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통일 이후 성배를 찾는 기사들의 모험담이 아서왕 이야기 후반부의 중요 주제가 된다. 성배는 바로 종교를 상징하는 것으로 성배의 부재가 국가를 황폐화시키고 있다는 설정은 국가 질서가 종교없이는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잃게 된다는 직접적인 비유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영화에서는 이러한 비유 뿐만 아니라 아서왕이 성배와 동일시되는 시퀀스를 집어넣음으로써 국가와 종교가 별개의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존 부어맨의 엑스칼리버는 아서왕 이야기를 새로운 해석으로 보여주는 영화다. 81년 작이라서 비주얼이 대단하거나 세련된 전개를 보여주는 못하지만, 본래 난잡하던 아서왕 이야기를 두 시간 짜리 영화라는 틀에서 잘 녹여냈다. 구비전승되던 이야기가 여러 기록자들에 의해 문서화되어 다양한 판본이 전해 내려오는 원작의 한계를 하나의 일관성있는 이야기로 잘 다듬어낸 감독의 연출력은 인정할 수 밖에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