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
이 영화는, 한 사냥꾼이 우연히 거액의 돈가방을 얻게 되면서 기계처럼 냉혹한 살인청부업자에게 쫓기고, 늙은 보안관이 그들 둘의 자취를 따라가는 길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살인청부업자는 사신(死神)처럼 가는 곳마다 죽음을 몰고 다니는데 동전을 던져 운명을 결정하도록 강요하는 모습은 사람의 그것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어떤 리뷰에서는 터미네이터의 재해석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터미네이터에게는 조우하는 어떤 인간도 살려두려는 의지가 전혀 없으므로 이 해석에 100% 동의하기는 어렵다.
사냥꾼도 능수능란하게 대응하고 심지어는 대담하게 살인청부업자를 공격하기도 해서 한숨 돌리는 기회도 잡지만, 결국에는 엘파소의 한 모텔에서 길거리 부랑배들의 습격을 받아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기껏 잘 도망쳤는데 살인청부업자에게 당하는 게 아니라 그저 강도를 당해서 죽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죽음은 원래 이런 성질의 것이다.)
살인청부업자는 사냥꾼이 죽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돈가방도 되찾지만, 마지막 살인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사냥꾼의 아내를 죽이러 간다.
K: 이게 내가 해줄수 있는 최선이야. 불러봐.
W: 당신 거기 앉아있는 걸 봤을 때 미쳤다고 생각했어요. 무슨 일이 있을지 정확하게 알았어요.
K: 불러봐.
W: 싫어요. 안 부를 거예요.
K: 불러.
W: 동전은 아무 말도 안 하잖아요. 바로 당신이잖아요.
K: 글쎄, 나도 그 동전하고 똑같은 식으로 여기 온거야.
살인청부업자가 말하길 “나도 그 동전하고 똑같은 식으로 여기 온거야(Well, I got here the same way the coin did.)”라는 말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살인청부업자는 모든 인간에게 드리워져 있는 예측할 수 없는 우연하고 갑작스런 죽음이라는 운명에 대한 상징이 아닐까 싶다.
사냥꾼의 아내의 집에서 나와-아마 그녀를 죽였을 것이다-돌아가는 길에 신호위반 차량에 의해 사고를 당해 팔 뼈가 살갗 바깥으로 튀어나올 정도의 중상을 입게 된다. 거칠 것 없이 활보하던 살인청부업자도 죽음을 미리 짐작할 수도 없고 결국에는 피할 곳 없이 죽음-사고사이든 자연사이든-을 맞이하게 될 운명임을 암시한다.
내 생각에는 영화 제목인 “no country for old men”의 의미는 노인들이 생각하는 중요한 가치가 미국에는 없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게 꼭 미국 뿐만은 아니고 어떤 곳에서든 인간의 야만은 오래 전부터 끊임없이 자행되었으니 “어떤 곳에도 노인들이 만족할만한 인간적인 가치는 없다” 정도로 해석하는 게 맞지 않을까?
노인들이 아버지의 세대(자신이 어렸을 때)와 자신의 세대에서 배우고 경험했던 가치들을 현실에서는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는 내용의 대화가 영화 곳곳에서 나온다. 늙은 보안관이 마음이 통하는 지인들과 만나서 나누는 대화의 내용은 대부분 이런 것들이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보안관은 자기 아내에게 이런 꿈 이야기를 한다.
좋아. 2개를 꿨어. 2개 다 아버지와 관련 있는데, 좀 독특해. 이젠 아버지보다 내가 20살이나 더 먹었어. 그러니까, 어떤 점에서 아버지가 더 젊어. 어쨌든, 한개는 기억이 잘 안나지만. 시내에서 아버지를 만나 나한테 돈을 좀 주셨는데, 내가 그걸 잃어버린 것 같아. 둘째는, 우리 둘 다 옛날에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말들에 타고 밤에 산속을 가고 있는거야. 산속에서 이쪽으로 가고 있는데, 춥고 눈도 쌓였어. 아버지는 나를 지나쳐서 계속 가셨어. 그냥 말타고 지나가셨던거지. 담요로 둘러싸고 고개를 숙이고 계셨어. 아버지가 나를 지나쳐갈 때, 봤는데, 뿔 속에 불을 가지고 계셨어. 옛사람들이 하던 방식대로 말이야. 그 안에 있는 불빛을 보고 알았지. 달같은 색깔이었어. 꿈속에서 알고 있었어. 아버지가 앞서 가고 계신다는 것을. 그리고 어둡고 추운 저쪽에 불을 피우려고 하신다는 것을 말이야. 내가 거기 갈때마다 아버지가 거기 계셨어. 그리곤 잠을 깼어.
여기서 나오는 “돈”과 “뿔 속의 불”은 인간들이 세대를 거쳐 공유하는 중요한 도덕적 가치에 대한 은유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 네가 옛날을 되찾으려고 애쓰는 그 시간에 말이야. 더 많은 것들이 저 문 밖으로 나가 버리는 거라구.”라는 전직 보안관의 말처럼, 어쩌다보니 아버지 세대가 물려준 그 가치는 자식 세대에서 잃어버리고 말아서 지금은 온전히 남아있질 않게 된 것이다. “내가 갈 때마다 아버지는 불을 피우려고 거기 계셨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중요한 가치는 여전히 원형 그대로 남아있지만 우리는 그 가치를 가지고 싶어해도 결코 손에 쥐지 못하고 “잠에서 깰” 수 밖에 없어서 아쉬워할 따름이다.
댓글 2개
k
영화는 아직 못 보고 책만 봤습니다만… 링크해 주신 리뷰는 정말 동감하기 어렵네요.
terzeron
k님, 안녕하세요?
영진공 짱가님 리뷰는 영화 리뷰에서 정치 평론으로 흐르는 바람에 제가 뭐라고 논평하기는 어렵네요.
같은 영화에 대해 여러 리뷰를 읽어보면 참으로 다양한 생각들이 나오는 것 같아서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