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문학

하루끼를 읽고

하루끼의 대표작인 ‘상실의 시대’의 영향이 커서 그런지 몰라도 하루끼는 허무주의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평단의 분류가 어떤지는 관심이 없다. 하루끼 매니아가 아닌 일반 독자로서의 개인적인 판단일 뿐이니까…

나는 하루끼를 굉장히 어린 시절에 읽었다고 할 수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집 옆에 새로 생긴 도서관에 들락날락거리다가 ‘노르웨이의 숲’이라는-당시로서는 대단한 성인소설로 인식되었던-하루끼의 작품을 읽게 되었는데 나중에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바뀌어서 재출간되었던 것이다. 출판사 기획팀에서 얼마나 고민을 했을지 눈에 선하다.

상실의 시대그때는 이런 표지가 아니었다. 녹색과 빨간색 두 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 제목 그대로 팔면 판매량이 얼마 안 되겠지?’
‘누가 이 제목이 비틀즈의 노래 제목이라는 걸 알겠어?’
등등…

어쨌든 그 책을 재출간한 출판사에서는 적절한 제목을 집어냈던 것 같다. 노르웨이의 숲이 어떤 책이었는지 까맣게 잊고 있던 나조차 친구들 사이에서 돌아다니던 상실의 시대의 겉표지에 작게 써있는 원제를 보고서 기억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상실의 시대…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시대… 그러니 허무할 수 밖에 없다. 교과서에서 보았던 한국근대소설인 ‘화수분’처럼 마지막에 희망을 주는 결말이진 않다.

알라딘에서 책 표지 이미지를 따오느라 얼핏 리뷰를 봤더니 상실의 시대는 하루끼의 유일한 리얼리즘 소설이라고 한다. 내가 참을 수 없는 하루끼의 가벼움이 상실의 시대에서는 용서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상실의 시대는 노르웨이의 숲만큼 충격적이진 않았던 터라(첫번째 글 참고바람. 나도 같은 책인지 알고 있다.) 후한 점수를 주고 싶진 않다. 우린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상실’했고 수많은 하루끼스런 글을 접해온지 오래이니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하루끼는 카버(숏컷의 작가 레이몬드 카버)의 짝퉁이다. 그래 난 ‘짝퉁’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애정을 담아서 짝퉁이라 불러주마. ‘하루끼, 애썼다. 흉내는 내는군. 하지만 당신은 카버를 능가할 수 없어. 그냥 하루끼스런 글을 쓸 따름이지. 그게 다야. 그래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것이다.’ (이건 하루끼 스타일의 클리셰를 내 멋대로 갖다 붙인 것이다.)

레이몬드 카버늘 상당히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저씨다. 형사 이미지라고나 할까…

하루끼는 카버를 존경하는 듯 하다. 카버는 조용하고 평범한 일상을 배경으로 하여 인물들의 미묘한 감정 선 위에서 줄타기를 하며 긴장과 여백을 그려낼 줄 아는 작가이다. 하루끼도 그를 닮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정말 오리지널이었다. 그것은 카버가 아니고서는 그릴 수 없는 세계이다. 그가 아니고서는 사용할 수 없는 언어였다. 그는 세계와 언어를 자신의 인생을 걸고 체득했다. 자신의 고통과 그 아픔, 기쁨에 의해 몸으로 얻은 것이다. 그는 다른 누구와도 다르다. 그가 남기고 간 공백은 어느 누구도 채울 수 없다.”

(카버에 대한 하루끼의 평가)

하루끼가 카버가 되어야 할 당위라도 있냐고 반문한다면 내가 무슨 답을 하리. 하루끼는 하루끼일 뿐이다. 가끔은 하루끼의 작품 중에서 카버를 연상시키는 듯한 단편작을 만나기도 한다. 바로 ‘침묵’이다.

나는 오자와 씨에게, 여태껏 싸워서 누군가를 때린 적이 있으세요, 하고 물어보았다. (중략) “제가 무서워하는 것은 아오키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아오키같은 인간은 어디에나 있는 데다, 그런 거에 대해선 이미 포기했습니다. 그런 인간을 보 면 무슨 일이 있어도 관련을 맺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좌우지간 도망치 는 겁니다. 도망치는 게 상책이다, 그런 얘기죠. 그런 건 어려운 게 아닙니 다. 그런 인간은 금방 구분할 수 있습니다. 또 동시에 저는 아오키에 대해 서는 나름대로 대단하단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기회가 올 때까지 가만히 엎드려 기다리는 능력, 기회를 확실하게 포착하는 능력, 사람의 마음을 실로 교묘하게 쥐고 흔드는 능력 ― 그런 건 아무에게나 있는 건 아니죠. 그런건 구역질이 날 정도로 싫어하지만, 그래도 그게 일종의 능력이란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제가 정말 무섭게 생각하는 건, 아오키같은 인간이 떠들어대는 말을 비판 없이 받아들여서 그대로 믿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만들어낼 줄 모르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입에 맞고, 받아들이기 쉬운 다른 사람의 의견에 놀아나 집단적으로 행동하는 패거리 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뭔가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고는 요만큼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군가를 무의미하게, 결정적으로 상처 입히고 있을지 모른다고는 짐작도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런 자신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정말 무서운 건 그런 사람 들입니다. 그리고 제가 한밤중에 꿈을 꾸는 것도 그런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꿈속에서는 침묵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꿈속에 나오는 사람들은 얼굴이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침묵이 차디찬 물처럼 모든 것에 점점 스며듭니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이 흐물흐물 녹아버립니다. 그런 가운데 제가 녹아들면서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겁니다.” 오자와씨는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저었다. 나는 그대로 다음 말을 기다렸으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났다. 오자와씨는 테이블 위에 양손을 깍지끼고 그저 가만히 잠자코 앉아 있었다. “아직 시간은 이르지만 맥주라도 마실까요?” 조금후 그가 말했다. 마시죠, 하고 나는 말했다. 확실히 맥주가 마시고 싶은 기분이었다.

뭐랄까… 이 작품에서는 카버의 숨결이 느껴진다. 마지막의 여운도 그러하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루끼는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을 시도한 작가이고 상실의 시대와 단편 몇 편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뉴 리얼리즘의 색을 드러내는 작품이 드물다고 한다. 그러니 카버라는 틀 안에 하루끼를 억지로 쑤셔넣을 필요가 있을 리가 없다. 이미 죽어버린 카버보다는 살아있는 하루끼가 한 편이라도 더 쓰지 않겠는가. 하루끼의 새로운 작품을 기대해본다. 하지만 난 하루끼 매니아가 아니다. 이미 너무 늙어버려서 그의 재치에 호응할 만큼 센스가 남아있지도 않고 그의 재즈를 들으며 양주를 홀짝거리면서 여자를 꼬시는 라이프 스타일은 내 기준에서는 놀구 먹으면서 늘어지는 상팔자란 말씀… 부럽긴 한데 나와는 동떨어져서 동감이 안 된다는 말씀…

하루끼~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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