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문학

그리스인 조르바

어두워질 무렵 우리는 노인의 집을 나섰다. 조르바도 술기로 거나해져 말이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두목님, 그저께 우리 무슨 이야기를 했지요? 당신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주고 싶다고 했지요? 맞았어. 아나그노스티 영감을 위해, 그 영감 눈이나 뜨게 하지 그러시오? 그 영감 마누라가 영감 앞에서 하는 짓 봤죠? 구걸하는 개처럼 얌전하게 명령을 기다리고 서 있는 꼴? 가서 가르쳐주지 그러시오.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다, 불알 까인 돼지가 소리를 지르며 길길이 뛰고 있는 앞에서 불알을 술안주 삼는 건 잔인하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데 굶어 죽으면서 하느님께 감사하는 건 미친 짓이라고 말입니다. 당신의 그 엉터리없는 설명을 다 들어 봐야 저 불쌍한 악마 아나그노스티에게 득될 게 뭐 있겠어요? 귀찮게 할 뿐이에요. 아나그노스티 할마시는 어떻구요? 괜히 기름더미를 불에다 던지는 격이죠. 부부싸움이 벌어지고, 암탉은 외람되어 수탉 노릇 하려 들 거고, 한바탕 붙어 털깨나 날겠지요! 두목, 사람들 좀 그대로 놔둬요. 그 사람들 눈 뜨게 해주려고 말아요! 그래, 띄워 놓았다고 칩시다. 뭘 보겠어요? 비참해요! 두목, 눈 감은 놈은 감은 대로 놔둬요. 꿈꾸게 내버려두란 말이오!

그는 말하다 말고 머리를 긁었다.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만일… 만일…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만일이라니, 뭐요? 들어봅시다!

만일 그 사람들이 눈을 떴을 때, 당신이 그들 현재의 암흑보다 나은 세계를 보여줄 수 있다면… 보여 줄 수 있어요?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타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는 잘 알고 있었다. 그 폐허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가는 알지 못했다. 나는 생각했다.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낡은 세계는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우리는 그 세계를 살며 순간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 그 세계는 존재한다. 미래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환상적이고 유동적이며 꿈이 짜낸 빛의 천이다. 보랏빛 바람 – 사랑, 증오, 상상력, 행운, 하느님 – 에 둘러싸인 구름이다. 이 땅의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라도 이제는 암호 이상의 예언을 줄 수 없다. 암호가 모호할수록 선지자는 위대한 것이다.

조르바는 비웃음을 띠고 바라보고 있어서 나는 골이 났다.

있어요. 나는 보다 나은 세계를 줄 수 있어요!

내가 대답했다.

있어요? 어디 좀 들어 봅시다!

설명할 수 없소. 당신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오!

보여 줄 게 없으니까 그러는 거지!

조르바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응답했다.

두목, 날 돌대가리로 보지 마쇼. 누가 당신에게 날 타고난 멍청이라고 했다면 그건 아주 잘못된 거요. 나도 아나그노스티 영감보다 더 배운 건 없지만 어디로 보니 그치만큼 멍청한 건 아니지요. 그래,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멍청이와 돌대가리 여편네에게 당신이 기대하는 게 뭐요? 이 세상의 수많은 아나그노스티는 또 어떻게 하고? 당신에게는 그들에게 보여 줄 암흑만 잔뜩 있다는 건가요? 지금까지 잘들 살아왔어요. 새끼 낳고, 손자도 보고, 하느님이 그들을 귀머거리나 장님으로 만들었어도 하느님을 찬양하리로다 어쩌구 합니다. 그 자들은 그대로 편한 거예요. 그대로 놔두고 아무 소리 하지 말아요.

파괴하기는 쉽다. 그러나 폐허 위에 세워질 새로운 세상에 대해 말하기는 어렵다. 비전을 제시하기가 어려운 이유도 이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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