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애프터 잡

그냥 해 본 생각입니다. 애프터 잡이라는 표현도 말도 안 되는 걸 그냥 지껄인 것에 불과하구요.

회사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나중에 회사를 그만 두게 되면 뭐할까 생각하다가 우연히 그 전날 읽었던 허접한 무협지가 떠올라서 고품질의 무협소설을 써보는 건 어떨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녁먹다가 그냥 농담삼아 회사 동료들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습작이라도 써봐라 내가 평가해주겠다', '잘 쓰는 작가들도 안 팔린다' 등등의 조언이 쏟아지더군요.

네, 저 무협소설 그다지 열심히 읽는 편 아닙니다. 문학 작품들이 지루해지면 가끔 무협소설이나 SF를 읽죠. 습작이라면 써 본 적도 없습니다. 게다가 김용 위주로 좀 쓴다싶은 작가들만 골라서 읽습니다. 900개 정도의 텍스트 파일이 있어서 그냥 좀 훑어보면 대충 누가 잘 쓰는지 감이 오긴 하는데 그다지 존경할만한 '작가'는 없더군요.

'조앤 롤링보다 김용이 글을 잘 쓰지만 해리 포터가 영웅문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는 조언도 있었는데 그 말이 맞긴 합니다. 하지만 누구나 돈을 조앤 롤링처럼 많이 벌기 위해 글을 쓰는 건 아니니까요. 김용만큼만 벌어도 적지 않을텐데요. 그러니 그 주장은 의미없는 명제가 되어버린 셈입니다.

이제 전문연구요원으로 복무해야 하는 기간이 딱 1년 남았습니다. 내년 11월이 되면 소집해제가 되는 거죠. 그런데 그 이후에 뭘 하고 살아야 할 지 고민이 많습니다. 개발이라는 게 소위 '노가다'(건축관련 육체노동)랑 별반 차이가 없어서, 오래한다고 개발자로서의 스킬이 확 느는 것도 아니고, 개발자의 가치란 게 인원 수가 중요하지 개개인의 능력은 별로 중요시되지 않는 인식도 문제가 있긴 한데 사용자의 인식을 제가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저더러 '당신 능력이 떨어지니 그런 소릴 하는 거다'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얼마나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10년, 20년 후에도 인정받는 개발자로 일할 수 있을까요. 우리 나라에서 나이 40이 넘으면 개발자로 일하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제 주위에서는 본 적이 없습니다. 코더(coder)말고 프로그래머나 설계자(architect)로 일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냥 30대 중반 넘어서면 중간 관리자(프로젝트 매니저나 팀장)를 할 따름이죠.

IT업종 치고 중소기업 중에서는 평균 연령이 높은 제가 다니는 T모 회사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올해 거래소 상장했습니다. 망해가는 업체는 아니란 소리죠.) 제가 전직하려 했던 N모 회사는 더 심합니다. 경력 10년도 안 되는 사람들이 중간 관리자를 하는 상황입니다.

물론 그 정도 경력이면 프로젝트 매니저 할 수 있죠. 하지만 요점은 그 사람들이 그동안 쌓아왔던 기술력을 바탕으로 설계자나 시니어 프로그래머로 활동할 수 있는데(외국에서는 시니어 프로그래머로 일할 경력입니다) 그러질 못한다는 거죠. 기술력을 쌓기도 어려운 근무 환경이거니와 주위 환경이 그를 개발자로 가만히 냅두질 않는거죠. 본인 입장에서도 개발자로 남아있는다는 게 불안하기도 할 겁니다.

이게 IT만의 문제일까요? 다른 이공계 분야는 어떠할까요?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만 IT보다 상황이 그다지 좋진 않을 거라는 짐작은 듭니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어쩌면 몇 년 후에 제가 요상한 필명으로 무협소설을 내놓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PC방이나 하나 차려서 낮시간에 손님없을 때 블로깅이나 하면서 놀고 있을 지도 모르겠구요. 아무 비전도 없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냐구요? 그래도 일에 시간에 치여 자신을 되돌아볼 여유없이 급박하게 살아가는 것보다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댓글 4개

  • RedGear

    2000년 쯤인가 처음 알게 된 이후로 제가 정말 좋아하지만 찾을 수 없던 가사를 값없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님께서 하시는 고민은 특히 이공계 우리들의 현재 문제를 그대로 솔직하게 지적해 주셨네요. 저는 님 같은 분은 이런 고민은 안 하시고 사실 줄 알았는데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냥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세상의 고정 관념을 깨 보시도록 부탁드리고 싶읍니다. 나는 50이 되어도 20대와 함께 똑같은 일을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풍부한 경험에서 나오는 일 처리 능력 대신 여유있는 시간과 약간 더 후한 보수만 받을 수 있으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말입니다. 정말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신다면 말입니다. 그럼…

  • RedGear

    한가지만 더, 저는 기계설계 분야에 종사하지만 요즘은 신입사원이 없어서 회사에는 나이 많은 사람들만 득실대지요 평균연령 40세랍니다. 전부 다 관리자는 될 수 없고 결국 살아남기 위해서는 40 까지도 노가다를 직접 할 각오를 하고 있지요.

  • Terzeron

    이게 제 나쁜 습관인데요. 농담을 진지하게 해서 다른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정말 무협지를 써 볼 생각은 없습니다. 무협소설이라는 쟝르가 제가 기대하는 높은 수준의 작품을 쓸만한 토양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파파스머프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RedGear님께서 해주신 말씀으로 다른 이공계 분야의 상황이 어떤지 약간 짐작이 가는군요. 하지만 IT는 전통산업과 달리 신기술에 대한 노하우나 감각이 없으면 정말 도움이 안 됩니다. 학교졸업할 때 배운 기술이 2,3년이면 아예 쓸모가 없어지는 경우도 더러 있거든요. 그래서 더 불안합니다. 뭐 기술 습득의 어려움이 문제가 아니라 창조적이지도 않고 노가다성이기만한 이 직종이 짜증나는 게 문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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