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담 서경덕
조선시대의 학자. 자 가구(可久), 호 복재(復齋), 화담(花潭), 시호 문강(文康). 본관 당성(唐城). 집안이 가난하여 독학으로 13세에 서경을 읽고, 복잡한 태음력의 수학적 계산을 해독했으며 대학을 읽고 격물치지의 원리를 깨달았다. 1509년(중종 4) 산속에 묻혀 후진 양성과 학문에 전심하다가 신병치로를 위해 22년 속리산, 지리산 등 명승지를 구경하고 수편의 기행시를 남겼다. 31년 생원시에 급제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진리 탐구에 전심, 이기론의 본질을 연구하여 우주 본질로서의 기와 이를 논하고 기와 이의 상관관계에서 천지만물이 형태화하며, 음양으로 분화한다는 이기일원론을 체계화했다. 사람의 죽음도 우주의 기에 환원되는 것이라는 사생일여(死生一如)를 주장함으로써, 노자 철학의 생사분리론과 불교의 인간 생명은 적멸한다는 주장을 배격했다. 44년 김안국 등이 후릉참봉에 추천했으나 사양하고 계속 개성 화담에서 성리학 연구에 전심, 도학, 수학, 역학 연구로 여생을 보냈다. 황진이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박연폭포, 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로 불린다. 개성 숭양서원, 화곡서원에 제향되었고, 75년(선조 8) 우의정에 추증, 85년 신도비가 세워졌다. 저서에 화담집이 있다.
화담 서경덕은 조선 중기의 주기론의 대가였으며, 독학으로 성리학의 한 일가를 이루었을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다.
주기론이란 화담이 주장한 이기일원론을 율곡 이이가 계승한 것으로 이(理)라는 원칙이 사물에 기운을 불어넣어 현실에서 현상이나 작용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주장이다.
성리학의 시조인 주자는 이와 기를 다른 것으로 보았는데, 화담은 주자의 이기이원론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이와 기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법칙에 불과한 이가 기의 작용원리로 사용될 뿐이라는 것인데, 정통 성리학을 따랐던 퇴계나 율곡이 이를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한 것과 확실히 차별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화담은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의심하라고 말했으며, 감각을 통해 받아들이는 것을 초월할 때에 올바른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점에서 서양의 데카르트에 비견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연암 박지원의 산문에 화담의 일화가 하나 소개된다.
“너는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
“저는 다섯 살 때 눈이 멀어서 지금 20년이나 되었답니다. 오늘 아침 나절에 밖으로 나왔다가 홀연 천지 만물이 맑고 밝게 보이기에 기쁜 나머지 집으로 돌아 가려하니 길은 여러 갈래요,대문들이 서로 엇슷비슷같아 저희 집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래 지금 울고 있습지요.”
선생은, “네게 집에 돌아가는 방법을 깨우쳐주겠다. 도로 눈을 감아라. 그러면 곧 너의 집이 있을것이다.” 라고 일러 주었답니다.
그래서 소경은 다시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리며 익은 걸음 걸이로 걸어서 곧장 집에 돌아갈 수 있었더랍니다.
이는 다른 까닭이 아닙니다. 색깔과 모양에 정신이 뒤죽박죽 바뀌고,슬픔과 기쁨에 마음이 쓰여서 이것이 곧 망상이 된것입니다. 지팡이를 두드리며 익숙한 걸음 걸이로 걷는것,그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의 본분을 지키는 이치요,집으로 돌아가는 증인입니다.
댓글 한 개
나그네
좋은 자료로 쓰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