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문학

오월의 노래 – 자크 프레베르

당나귀와 왕과 나
우리 셋은 내일 죽겠지
굶주림의 당나귀
권태의 왕
그리고 사랑의 나

분필로 쓰듯 손가락으로
세월의 반석 위에
우리의 이름을 새긴다
포플라나무에서 바람이
당나귀여 왕이여 인간이여 하고
우리를 부른다

검은 넝마의 태양
우리 이름이 벌써 지워졌다
목장의 시원한 물
모래시계의 모래
붉은 장미의 장미꽃
학생들의 길

당나귀와 왕과 나
우리 셋은 내일 죽겠지
오월에
굶주림의 당나귀
권태의 왕
그리고 사랑의 나

인생은 버찌 한 알
죽음은 씨앗 한 톨
사랑은 벚나무 한 그루

사랑은 벚나무이고, 그 열매인 인생은 버찌에 비유된다. 인생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죽음은 다시 씨앗으로 벚나무로 자라나 사랑이 된다. 굶주림과 권태와 사랑 모두 죽음을 유예한 상태이니, 삶이란 살아있음과 죽음이 공존하는 것 자체일 수 밖에 없다. 반석 위에 새긴 이름이 세월에 의해 곧 지워지듯, 시원한 물이나 모래 시계의 모래, 장미꽃 등이 가지는 이미지는 덧없음과 함께 오는 순간적 의미일 따름이다. 그러나 그런 단순함과 순간성 속에서도 사랑은 다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함으로써 인생의 자양분이자 죽음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3년 전에 쓴 글을 다시 찾아 보다. 누가 보내주었던 시인가 아니면 내가 골라놓은 시일까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집에 자크 프레베르의 시집이 있는 건 확실하다.

제목이 “당나귀와 왕과 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시 찾아보니 “오월의 노래”란다. 지난 번에 올렸던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와 비슷한 싯구절이 나오기 때문에 잘못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오월은 생명력이 강렬하지는 않더라도 만물이 가장 아름다운 시기이다. 그래서 메이퀸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시는 권태와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위에 짧게 해설을 했다시피 시인은 권태와 죽음과 아름다움과 사랑(love for reproduction)은 같은 줄로 이어져 있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걸꺼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전업 비평가나 시인이 아니다보니 확신은 못 하겠다.)

예전의 그 누군가가 내게 좋은 시를 보내주었고 나는 또 다른 좋은 시를 찾아서 보내주곤 했었는데 이제는 그 이름도 희미해졌다. 시간의 먼지는 아름다운 기억 위에 쌓이기 마련이다. 그 누군가가 보내주었던 시는 어떤 시였을까? 아마 이제는 평생 기억해내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시집을 사지 않는다. 시란 사랑과 환희, 슬픔 등의 격정을 증폭시키기 위한 표현 방식이므로 감정이 더 이상 요동치지 않는 삼십 대에게는 함축된 시어에 숨어있는 폭발력을 감당하기 어려운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가끔…

댓글 2개

  • Terzeron

    사람마다 좋아하는 시가 다른데 함부로 권할 수 있을까요? 음악보다 시는 더 거부감이 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편안한 명상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지브란의 '예언자'를, 사랑의 기쁨에 빠진 사람에게는 포우의 '애너벨 리'를, 사랑의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는 네루다의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를 지적 유희를 즐기고 싶은 사람에게는 정현종의 '세상의 나무들'을, 고통 속에서 절망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을, 우리네 토속적인 정감을 되새기고 싶은 사람에게는 신경림의 시집(어떤 것이든)을 권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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