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오늘 김밥먹다 겪은 당황스러운 일

신사동 포토피아에 다녀오느라 지난 번처럼 강남역 지하 상가에 있는 충무 김밥 매장에 들어가서 충무 김밥 1인분을 시켜 먹었다.

혹시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여기 매장은 작은 편이었는데 2인 식탁이 2개, 1인 식탁이 3개 놓여 있다. 끄트머리에 있는 1인 식탁에 앉아서 충무 김밥 1인분을 주문하고 기다렸다가 먹기 시작했다. 한 식탁에 다른 일행과 함께 자리한 어떤 할아버지께서 전화를 연이어 받아서 큰 소리로 통화하시는 걸 힐끗 쳐다보고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속으로는 공중 예절이 어떻고 하면서 생각이 많았지만 연장자니까 잘못을 지적하는 것도 너무 무례한 일이 될 것 같아서 그냥 넘겼다.

이 충무 김밥이라는 게, 김밥:오징어 무침:무우 김치가 1:1:1의 비율로 구성되어 있어서 먹다보면 김밥이 좀 먼저 떨어지고 오징어 무침이랑 무우 김치는 좀 남게 되어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김밥을 다 먹고 오징어와 무우를 먹고 있었나보다. 어차피 반찬은 남기면 버리니까 아까워서 다 먹고 있었던 뿐이었다.

그런데 식사를 이미 다 하셨는지 아까 그 할아버지께서 계산을 하고 나가시면서 갑자기 나를 가리키며 “이 젊은이, 김밥이 모자라니까 내가 돈을 낼 테니 더 주게…”라고 종업원한테 말씀하시는 거였다. 처음에는 나를 지칭한 건지 몰랐는데 내 등을 친절히(?) 두드려가며 김밥을 더 먹으라고 하시는 거였다.

뭐, 그 할아버지의 의도는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치더라도, 식사량이 모자란다고 생각하면 내가 내 돈 지불하고 사먹으면 될 일이지 남의 돈을 얻어가면서 먹을 이유야 전혀 없는 일 아닌가. 나도 어엿한 직장을 다니고 수입도 꽤 되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께서 큰 소리로(식당이 워낙 좁다보니) 다들 날 쳐다보게 되었고 난 졸지에 돈 없어서 김밥 못 먹는 불쌍한 인간이 되었다. 물론 그런 당황스러움은 잠시뿐이었지만…

나는 거듭 사양했고, 그 할아버지께서는 “오해는 하지 말라”고 하신 후 식당을 나가셨지만 내 기분은 그다지 유쾌하진 않았다. 내가 아무리 업셔리('안티 럭셔리'라면 이해가 갈런지?)주의를 실천하고 다닌다지만 남들에게 그렇게 돈없어 보이나 싶었다. -_-;;

우리 한국 사람들은 너무 남의 일에 쓸데없는 관심을 가지는 것 같다. 예를 들면, 길에 사람이 피흘리고 쓰러져 있으면 남들이 어떻게 하겠지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말이다. 정작 관심을 기울여야 할 곳이 아니라 엉뚱한 곳에 관심을 기울이는 셈이다. 식당에서 잔반 남기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한테 김밥 사주겠다는 별로 반갑지 않은 호의말고 그 돈으로 차라리 다가오는 겨울이 두려울 불우이웃을 돕는 건 어떨런지…

그 순간에 그 할아버지께 그런 이야기를 드렸어야 하는 건데, 나도 순간 당황해서 그냥 지나가고 말았지만 나부터 남의 개인적인 일에 헛된 호기심을 보이지 않도록 해야겠다. 그게 얼마나 당사자에게 곤란한 상황을 만드는지 오늘 스스로 깨달았으니 이로써 충분하다.

댓글 6개

  • artinus

    사실 의도야 고마운 일이고 대충 저런 감성이 '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 돼서 순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결혼 후 몇 년이 지나도 아기가 생기지 않는 부부에게 왜 아이를 갖지 않냐고 자꾸 묻는다거나 소위 들 말하는 혼기를 넘긴 미혼 남녀에게 인사나 몇 번 건넨 사람들이 집요하게 결혼에 대한 압박을 가하거나 하는 걸 보면 상대가 어른이든 아이든 빽! 소리라도 지르고 싶어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예요 정말.

  • 파파스머프

    다행히 그 상황에서는 많이 난처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경우에 따라 그 할아버지의 위선일 수도 있고, 착각일 수도 있고, 호기일 수도 있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마음 편하지 않았다는 점에는 동감합니다. 그래도 최소한 그 분의 악의는 없었을 것이기에 그냥 모른 척 하신 것이 잘하신 겁니다. 정말 결혼해서 아이를 못 낳는 사람에게 아이를 못 갖느냐고 하면 마음의 상처가 될 수 있지만, 실제 능력이 충분한 사람은 그런 말 듣더라도 씽긋 웃어버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거든요.. 다만 남을 도울 때도 상대를 배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 농우

    고려하고 배려해야할 상황이 많은것도 사실이고, 그 순간에 매우 당황하셨으리라 생각되지만…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그런 '관심'내지는 '정'의 고갈이 세상을 점점 척박하게 만들어가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 Terzeron

    그렇죠. N명이 모인 집단에서 한 사람의 가치는 1/N이라는데 천만명이 모인 서울에서는 한 사람의 가치가 1/1000밖에 안 되니 개인 사생활이 침해받기 쉽고 그러다보니 타인으로부터 내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 가시를 곤두세우는 고슴도치처럼 되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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