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Death and Life
Gustav Klimt

지난 수요일, 고등학교 친구의 모친상을 거드느라 경기도 광주에 다녀왔다.

친구 어머니께서는 교회 신자이셨기 때문에 교회식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기도와 찬송이 반복되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나는 예배에 끼지도 못하고 그 자리를 뜰 수도 없어서 꼼짝하지 못한 채로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병을 앓다가 사망한다면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겠지만, 급작스러운 질환이나 사고로 죽게 된다면 삶과 죽음은 찰나에 서로의 자리를 바꾸게 되는 셈이니 당사자는 물론이고 주위 가족들까지 그 허망함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누구도 내일 살아 있을 것을 장담할 수 없는데 인간은 왜 이리 교만한가? 어째서 시간을 낭비하는가? 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욕심을 내는가? 이런 아둔함은 삶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삶에 대해 자신감을 갖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감을 가지고 살 되, 오늘 한 일을 내일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늘 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타인의 죽음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생명이 유한하며 인간의 아집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깨닫는 것이다.

댓글 2개

  • chantage

    인생이란 무엇인가? 삶의 의미는? 사춘기 때 하는 질문들입니다. 지금 어른들은 그 시기를 거치고 당당한 어른이 되었습니다. 사춘기 때 확실한 답을 깨닳고 다음 단계로 성장한 것입니까?

    대개는 "질문하지 않고 사는 범"을 배우면서 다른 "더 중요한 일"에 신경쓰게 되며 어른이 되고 사춘기를 넘긴 것 같습니다.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외면하고 사는 버릇을 익힌 것이죠. 죽음에 대한 물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자기에게 닥치지 않는한 묻지 않는 것이 어쩌면 우리가 말하는 어른스러운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을 계속 던져서 무슨 답을 얻을 수 있을까요? 42? 그래도 나름대로 답을 확인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맞는지 틀리는지는 남이 보기에 모르지만. 계속되는 질문에도 불구하고 답을 구하지 못하면 "없다"가 답이 되고, 허무함으로 인해 자살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철학자도 그런 사람들 있죠.

    이러한 천성적 "무시"위에서 말씀하신 인간의 교만, 아집이 피어나는 듯 합니다. 그저 도중 하차를 막기위한 생명 본능에서 나온 것일까요?

  • Terzeron

    chantage님, 철학적 명제에 대한 결론을 구하지 못하는 것과 허무와 자살은 인과율이 희박해보입니다. 삶의 의미는 찾는 곳에 있지 않고 만들어 가는 곳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질문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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