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에 대한 예의 – 권위에의 호소

토론에 있어서 몇 가지 피해야 할 인간 유형이 있다. 오프라인이나 온라인이나 똑같다.

첫째, 억지 부리는 사람

더 설명할 필요가 있나? 난 머리가 있는 사람이랑만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세상에는 당신과 다른 사람들도 많고 서로를 인정하는 미덕이 없으면 대화의 상대로 존중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

자기 말만 그럴싸하게 늘어놓으면 상대가 납득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 토론이 생산적인 결과를 낳으려면 상대방을 인정은 못 하더라도 이해해보려고 애를 쓰는 자세가 필요한데, 그게 부족한 사람은 백날 토론을 해봐야 득이 없고 힘과 시간만 축날 뿐이다.

셋째, 논거를 대지 않고 주장만 늘어놓는 사람

주장은 많은데 근거가 없다. 주장과 또 다른 주장을 연결하는 논리적 연결점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냥 논거없이 논증을 한다. 자기 말이 맞는단다.

모든 언술에 논거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상식일 수도 있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공통의 전제일 수도 있다. 토론 참가자가 인간이기에 얼기설기 대충 이어놓은 논리를 보일 수도 있다. 이런 언술은 묵인 하에 서로에게 받아들여지지만, 언술이 주장이 되고 최소한 상대가 납득하지 못하여 논박하는 사항에 대해서는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이 논거를 댈 필요가 있다.

넷째, 권위에 호소하는 사람

한참 이야기하다가 자기가 할 말이 없으면 전문가의 발언이나 유명한 책의 문구를 인용하면서 '이거 봐라. 여기 이렇게 되어 있지 않느냐?'라고 들이대는 사람. 첫째, 둘째, 셋째 유형보다는 똑똑하지만 전문가나 전문서적의 권위가 당신의 권위라고 착각하지 마라. 당신은 그 전문가가 아니다.

언젠가 투표의 당위성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었는데 상대와 논쟁이 길어졌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갑자기 알튀세와 하버마스를 들고나와서 투표를 권유는 내 태도가 파시즘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었다. 자기가 알튀세와 하버마스를 잘 알아서 언급을 한 거라면 내가 그 논의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잘 모르겠으니 설명해보라고 했을 때 제대로 답을 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그 질문에 대해서는 전혀 논평을 하지 않은 채 슬쩍 다른 말로 빠져나갔다. 내 각론에 대해 자기가 매크로한 입장으로 다가갔다면서…

(지금도 그 게시물을 볼 수 있는데 링크를 달았다가 지운다. 그 사람의 명예를 내가 일방적으로 비난해서 실추시키는 꼴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도 다른 사람 블로그에서 논쟁이 있었는데 내가 자꾸 그의 주장이 틀렸다는 반례를 들면서 반박을 하니까 더 자세히 이야기하려면 '누구'의 '어떤 이론'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면서 발을 뺀다. 나는 그 '누구'도 잘 모르고 '어떤 이론'에 대해서는 전혀 들어본 바도 없다.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면 자신이 토론에서 이겼다고 생각이 드는 걸까? 이야기를 하든가 아니면 아예 언급을 하지 말든가… 토론의 상대인 나로서는 어쩌란 말인가?

이런 사람들의 주장이 옳았는지 내 주장이 옳았는지 지금 와서 판정을 내릴 생각은 없다. 다만 자기가 타인의 주장을 인용하려면 최소한 그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하든가 아니면 같이 공부해보자고 하든가 아니면 그 맥락에서 그 인용이 왜 적절한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책임지고 설명을 해야 한다.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무지한 상태로 남아있으려는 고집은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토론에 있어서 권위에 호소하고 자신의 주장을 정립시키지 못하는 이들은 무지한 상태로 남아있으려는 고집을 부리는 것과 같다.

결과적으로는 겉은 번드르르해도 앞의 유형들과 그다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상황을 왜곡하고 비겁한 수단을 썼다는 점에서는 앞의 유형들보다 더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렇게 스스로의 인식과 논리와 주장에 대해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이야기를 늘어놓질 않는 게 좋겠다. 권위에 호소하면서까지 입도(粒度)가 낮은 사고를 하고 논리를 전개하려면 차라리 모른다고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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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의 토론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정리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오프라인 토론보다 분명히 장점을 가진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투자했음에도 불구하고 토론에 대한 예의(인간에 대한 예의에 앞서)랄까 규칙이랄까, 그걸 지키지 않는 상대와의 토론은 오프라인 토론보다 시간이 훨씬 아까울 뿐이다.

서로 다른 주장을 할 수도 있고 서로 상대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끝날 수도 있는 게 토론이다. 그러나 토론에 대한 규칙과 예의를 갖춘 상대와의 대화는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여도 부끄럽지 않고(오히려 내가 배운 셈이 되니까 고맙고), 상대의 주장을 납득하지 못해도 입장 차이를 명확히 한 것, 그리고 타인의 정상적인 사고의 결과가 되는 인식이 어떠한 것이다라는 이해에 도달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된다. 이런 토론이라면 적극 환영이다.

Astral님께서 걸어주신 트랙백 글의 주소입니다.
“권위에의 호소와 승부욕” http://astralepic.egloos.com/815041

토론에 대한 예의 – 권위에의 호소”에 대한 4개의 생각

  1. 토론을 하거나 상황에 따라 의견차이가 심하다고 느껴질 때, 제가 쓰는 방법중의 하나는 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는 거죠. 이상하게도 상대방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면서 그 사람과 다른 주장을 하게 되면, 최소한 상대가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가 없으니..^^ 물론 상황에 따라 저도 도저히 못 참을 때가 있지만, 그럴 때는 차라리 중단하는 것이 좋더군요. 같이 이야기하다보면 그보다 더 낫거나 같거나 그보다 못 된다는 것, 모든 게 싫어지니… ^^

  2. 쁘뉴마님, 감정 대응을 하는 사람들을 상대하기도 어렵긴 한데요… 그런 사람들과는 애초에 토론할 생각을 버리게 되더군요. 1번 유형처럼 억지 부리는 거랑 비슷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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